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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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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t 골프역사1편

골프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창시자나 그 기원이 확실하지 않다. 초창기 골프의 역사를 파악하는 일은 거의 대부분을 상상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골프협회(United States Golf Association, USGA)는 로마시대 시이저 황제(BC100~44)때 로마인들이 파가니카라는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바로 골프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프랑스의 죄 드 마이(jeu de mail)나 네덜란드의 콜벤(kolven)이라는 경기가 골프로 발전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파가니카는 경기 규칙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병사들이 야영지에서 휴식 시간에 한 쪽 끝이 구부러진 스틱과 새털로 속을 채운 공을 치며 즐기는 경기였다. 로마인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전 유럽을 정복하고 영국 해협을 건너가 잉글랜드와 스코들랜드를 점령한 후 4세기까지 머물러 있었다. 이때 원주민에게 이 경기가 전파됐다고 한다. 이것이 골프의 전신이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경기가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지에도 있었다. 이러한 주장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골프를 탄생시킨 개척자는 바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스코틀랜드가 골프의 발상지라고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골프가 크게 성행한 곳은 베네룩스 3국 일대였다는 설도 있다. 골프는 스코틀랜드에서 15세기에 유행됐는데 네덜란드에서 15세기 훨씬 이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몇 점의 그림이 발견됐다. 이 그림 가운데 초기의 골프클럽과 매우 흡사한 모양의 구부러진 스틱에 기대고 선 네덜란드인의 그림과 헤드가 큰 골프클럽을 팔에 안고 서 있는 소녀의 그림이 있다.스코틀랜드에서 골프가 정식으로 선을 보이기 전에 북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골프와 아주 비슷한 경기가 있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지금도 이곳의 초지에선 주민들이 이 경기를 하는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는데 골프보다 당구나 하키에 가까운 것이다.

네덜란드인들 사이에 'kolf'라고 불린 이 경기는 2피트 높이의 담 벽에 둘러싼 가로 60피트, 세로 25피트의 지면이 평평한 장방형 구역 안에서 행하는 것이었다. 이 장방형 구역의 한편 담 벽에서 10피트 떨어진 위치에 직경 5인치의 기둥을 좌우에 세우고 반대편에서 공을 봉으로 쳐서 맞추는 경기다.
경기자는 놋쇠로 만든 무거운 헤드를 붙인 4피트길이의 클럽과 철사로 꿰맨 야구 공만한 크기의 탄력 있는 공을 사용한다. 두 개의 기둥을 가장 적은 타수로 맞춘 자가 승자가 된다. 비겼을 때는 공의 위치와 담 벽의 근접 거리로 판정했다. 따라서 힘보다 기술과 섬세한 터치가 요구되는 경기다. 이점은 당구나 크로켓과 같다.
1350년대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 라틴어로 'Choulla', 불어로'Choulle'라는 경기는 'kolf'보다 현재의 골프와 비슷했다. 이것은 벨기에 사람중 특히 농민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이 경기는 매우 단순했다. 필요한 도구는 커다란 쇠머리를 붙인 클럽과 목재(밤나무)로 만든 달걀 형태의 공을 사용했다. 경기 방법은 출발점과 목표 지점(나무나 돌, 기둥 따위)으로 나뉜 약 1/2마일 길이의 코스에서 나무나 돌, 기둥 따위의 목표를 적은 타수로 맞추는 것으로 1대 1, 혹은 3~4인으로 팀을 짜서 대항했다. 그들은 흔히 내기를 많이 했다. 먼저 가장 적은 타수로 맞추겠다고 선언한 사람이 이에 맞서 내기를 건 상대방과 경기를 벌이게된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6타로 맞추겠다고 밝혔으면 상대방은 될수록 타수를 늘리려고 A의 플레이를 방해한다. 이 때 움직이는 공은 칠 수 없으며 반드시 정지된 상태의 공을 쳐야 했다. (이 점이 골프와 같다.) 먼저 A가 3번 연속해서 공을 칠 권리를 가지며 그 다음부터 상대방이 치는데 상대방은 될수록 목표의 반대쪽이나 치기가 곤란한 개울이나 담 밖으로 친다. 이렇게 경기해서 이긴 편이 내기에 걸린 돈을 차지했다.
팀을 구성해서 시합할 때는 공격측과 수비측으로 나눠 양 팀이 교대로 타구했다. 따라서 승패를 가리는 모든 경기가 그렇듯 플레이가 난폭해지는 일이 많았다. 당시의 법전 기록을 보면 쇠머리 클럽으로 경기도중 상대방의 머리를 때려 상처를 입히는 사례가 많았다.

프랑스 역시 이것과 비슷한 펠 멜(Pell Mell)이라는 나무 그루터기에 둥근 쇠테를 걸고 멀리서 새털 공을 쳐넣는 경기가 있었다. 결국 유럽 각국마다 골프와 비슷한 경기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역사를 기록할 수 없는 유사이전의 목동들이 그들의 긴 지팡이로 술내기 공치기를 하던 것이 차츰 발전해 이러한 경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추측일 뿐이지 확실한 근거는 없다.단지 유일한 자료는 고고학자들이 암흑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끝이 단단한 타구 봉을 발견한 것과 미국의 골프 전당에 15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사용했던 클럽과 비슷한 여러가지 모양의 클럽이 있을 뿐이다.

 
dot 골프역사2편
1457년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2세는 골프와 축구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경기가 처음으로 문서에 등장)했다. 이 법령의 공포 1백년 전부터 골프는 이미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게 인기 있는 운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제임스 2세의 이 같은 조치는 스코틀랜드가 항상 이웃 잉글랜드의 위협 아래에 있었으므로 모든 남자는 무술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 아래서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남자들이 무술 연습보다 골프나 축구에 열을 쏟자 마침내 왕명으로 금지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골프 탄생 초창기는 왕권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탄압 정책의 일환으로 휴일은 전혀 골프를 할 수 없었으며 네덜란드에서 수입하던 골프볼은 세금이 부과됐다. 하지만 완고하고 개인주의적인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법을 무시해 골프는 여전히 성행했다.
1491년 제임스 4세는 한층 강력한 제재를 가해 위반자는 구속하고 많은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일반 시민과 귀족들은 왕에게 직접 항의했다. 그들은 국민 건강에 유익한 스포츠를 금지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은 "스포츠는 힘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골프는 이런 요소가 없으므로 스포츠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왕에게 직접 시험해 보기를 권해 왕은 몇 번 스윙해 보았지만 잘 맞지 않아 볼은 불과 몇 미터를 굴러갈 뿐이었다. 이에 화가 난 왕은 이튿날 다시 코스에 나가 샷을 성공시키려고 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왕은 그 후부터 열렬한 골퍼가 됐다. 따라서 법은 아무 의미 없는 글자에 불과하게 됐고 골프 인구는 점점 늘어나 왕족을 비롯해 귀족, 상인, 평민 등 각 계층에 널리 보급됐다.

제임스 5세(1512~1542)는 열렬한 골퍼였고 그의 딸 메리 공주도 골프 광이었다. 메리 공주는 파리 유학 시절에도 골프를 했다. 공주가 골프를 할 때 학생들은 골프클럽을 어깨에 메고 공주의 시중을 들었다. 메리 공주는 그들을 Cadets(아우, 생도라는 뜻. 불어 발음은 Cad day)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캐디(Caddy)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었다. 특히 메리 공주는 자신의 시녀인 메리 세턴과 함께 골프를 해서 경기에 지자 그녀에게 목걸이를 선물 했던 일화로 유명하다.
메리 여왕의 아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에 골프를 도입시켰다. 제임스 6세는 런던 근교 블랙히스에 1608년 6홀 코스를 만들었다. 이후 1754년 골프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코스가 정식으로 개장했다.
왕족의 비호를 받던 골프는 점차 지위를 굳혀 갔으나 또 다시 교회의 방해에 부딪혔다. 당시 교회는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회는 안식일에 골프를 하는 행위를 신을 모독한 행위라고 단정했다. 교회의 압력으로 1593년 에든버러에서 안식일의 골프를 금지했고 예배 시간에 골프를 하는 사람은 고발당했다. 1651년 용기 있는 몇 명의 골퍼가 당국에 항의 햇지만 그들은 모두 불경죄로 몰려 처벌받았다.

초창기 골프는 대부분 해안을 가로질러 나가 마을 어귀의 여관 근처로 추측되는 특정 지점에서 끝나는 어부들간의 경쟁적인 경기가 됐을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후일 잔디가 덮인 코스에서 하는 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당시 코스에는 인공적으로 장애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스코틀랜드 도처에 자연적인 코스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때의 코스는 페어웨이가 매우 좁고 홀의 숫자는 제한돼 항상 골퍼들로 붐볐다. 골퍼들의 의상은 반드시 코트를 입는 것이 이때의 풍습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골프를 체계적인 경기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즉 골프만 전문적으로 추구하는 클럽이 탄생됐고 공인된 규칙이 제정됐다. 최초의 골프클럽으로 그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 곳은 젠틀맨 골퍼스 오브 리스(Gentlemen Golfers of Leith.그 후 오너러블 컴퍼니 오브 에든버러 골퍼스(Honourable Company of Edinburgh Golfers로 개칭))로 1744년에 설립됐다.
로열 블랙히스와 로열 버지스는 모두 자신들이 최초의 클럽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골퍼 수첩>(The Golfer's handbook)은 블랙히스를 1608년에 창립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클럽의 존재를 밝혀주는 기록은 1766년에야 비로소 등장했다. 1766년은 로열 블랙히스의 실버 클럽에 처음으로 볼 하나가 부착된 해였다. 18세기는 각 골프클럽들이 자체적으로 대회를 열어 거기서 우승한 사람을 그 다음 해의 회장으로 선정하는 것을 관례로 따랐다. 그리고 회장의 이름과 날짜가 새겨진 실버 볼 하나를 실버 클럽에 붙여 놓곤 했다. 1754년 소사이어티 오브 세인트 앤드류스 골퍼스(Society of St. Andrews Golfers. 그후 1834년 윌리엄 4세에 의해 로열 앤드 앤션트 Royal and Ancient로 개칭됨. R&A)는 실버 클럽을 사들였다. 이들은 13개 조항의 정관을 채택했는데 이 정관은 최초의 공인된 골프 규칙이자 오늘날 전세계 골프 규칙의 원천이 됐고 마침내 사실상 세계 지도상의 모든 나라에 골프를 보급시켰다.
 
dot 골프역사3편
19세기 말 수많은 골프 코스가 건설되고 양질의 고무볼이 개발됨에 따라 골프는 이제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골프는 오늘날과 같은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 세계 곳곳에서 상당수의 골프클럽들이 설립 1백주년을 맞았다.
이는 바로 1세기 전에 일어났던 골프 혁명의 규모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골프가 소개된지도 1백년을 넘어섰다는 점만 보더라도 골프의 인기는 빠른 속도로 전세계로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미국에서 천 여개에 달하는 골프 코스가 건설될 정도였다.
새로운 골프 코스들이 건설되면서 골프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프로 골퍼들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골프 장비들도 크게 개선됐다. 최근에 들어서면서 또 다시 세계 각지에서 골프 붐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국제적인 규모의 골프대회에 참가한 수퍼 스타의 활약이 TV을 통해 방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에 자극받고 고무됨으로써 골프 대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골프는 남녀노소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운동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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