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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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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코스       골프대회       한국최초의 골퍼 3편       한국최초의 골프연습장
   

dot 한국최초의 골프코스

한국 최초의 골프 코스는 '구한말 외국 고문이었던 영국인들이 원산 세관 구역 안에 6홀의 골프 코스를 만들어 놓고 골프를 즐겼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가 1900년경이었다.
일본의 최초 골프 코스가 영국인 구론이 1901년에 설계한 고베로코우산이고 보면 오히려 한국의 골프 역사가 일본보다 일찍 시작됐다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이가 후일 경성골프구락부의 회원이기도 했던 일본인 다카토미 타네오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증거를 보다 확실하게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1937년 일본의 한 잡지에 기고한 <조선골프소사>를 보면 '구한국 시대인 1910년 원산 해변가 세관 구역 내에 외국인 고문이었던 영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6홀 골프 코스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어 '1913년 외인촌, 그리고 황해도의 구미포에도 외국인의 골프 코스가 있었는데 엄중한 관리 아래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의 출입도 금지해 그 규모는 알수없다.'고 썼다.
실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방증 자료는 1972년 일본 세관협회가 발행한 <세관 백년사>로 '1880년 원산이 개항됐고 관세의 징수 사무를 청국에 위촉했는 바 당시 한국 세관 업무의 관리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에 의해 운영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세계 각지로 진출했던 영국인들의 생활 풍습상 상주하는 곳마다 반드시 골프 코스를 두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기록은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자료 외에 당시 골프 코스 인근에 살았던 주민들의 일치된 증언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고 원산 시가지를 정비할 때 해변가의 외국인 주택지에서 낡은 골프클럽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후 일제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면서 영국인을 비롯해 구한말 외국인 고문들은 본국으로 철수할 수수밖에 없었고 이 땅에 상륙했던 골프는 긴 휴면기를 거쳐야 했다.
한국에 골프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7년 후였다.
그것도 한국에 상주하는 일본 관민이 점차 증가하면서 그들의 주도 아래 골프장 건설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dot 효창원 골프코스
1917년 당시 조선 철도국이 만주 철도국으로 바뀌었을 때 철도국 직영이었던 조선호텔이 여행객 서비스와 외국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골프 코스 조성 계획을 마련했다.
이 일에 대한 조선철도국 이사 야스카츠 마타사부로우의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중국 대운만철 본사에 출장갔다가 성포 골프 코스를 둘러보게 됐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골프를 관전하게 되는데 다듬어진 코스코스의 아름다움과 플레이가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 경성에도 골프 코스를 만들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후 철도국장 구보요우 도우와 지배인 고하라 사다오의 협력으로 1918년 5월 골프장 설비 확정 허가를 얻어 용산 효창원 부근의 국유지를 차용해 1919년 5월에 본격적으로 건설에 착공했다.
코스의 설계는 일본 고베 골프 클럽 회원인 댄트(H. E. Dannt 1915년 일본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선수권 보유자)가 맏았고 9홀 공사에 공사비는 당시 금액으로 6천엔이었다.
우선 6홀 코스를 만들고 그후 확장됐으나 코스 손질이 힘들어 결국 7홀만 플레이가 가능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골프 코스의 건설은 나무를 베고 산을 깎는 난공사로 2년이 걸렸고 드디어 1921년 6월 1일 개장했다.
한국에서 실질적인 근대 골프 코스의 진면목을 드러낸 경성 골프 코스(효창원 코스)가 개장된 1921년 6월 1일.
이 날은 한국 골프계에 기념비적인 날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원산 해변 코스는 세관 구역 안에 위치했고 외국인이 주로 이용해 대중적인 골프장이 되지 못한 채 최초라는 역사성만 가진 것으로 풀이된다.
경성 골프 코스의 이용객은 조선호텔에 투숙하는 외국 여행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처음부터 운영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골프장은 회원 유치에 나섰다. 당시 위촉된 회원들은 대부분이 골프에 문외한이었고 관리나 유지들이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효창원 골프 코스는 차츰 자리를 잡았다.
1922년 6월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으로 아리요시추유이치가 취임했는데 그는 영국식 골프에 조예가 깊어 골프의 진수를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 올바른 골프를 전수시키는데 공헌했다.
이를 계기로 효창원 골프 코스는 관리나 유지들의 한정된 영역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수 있었다. 이 영향을 받아 1923년에 대구에도 9홀 규모의 골프 코스가 조성돼 대구 골프 구락부가 창립됐다. 그런데 효창워 골프코스는 개장한 지 2년이 채 안된 1924년 4월 효창원 일대가 공원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부득이 하게 폐장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었다.
효창원 골프 코스의 공원 지정은 후일 서울골프장(군자리 코스)이 어린이 대공원으로 바뀌는 선례로 남았다.
효창원 골프코스는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조선호텔)이 외국인 투숙객을 유치해 호텔에서 경영한 골프장이었고 이 곳은 처음으로 경영난을 겪었다. 그러나 온갖 역경을 이겨내면서 우리 나라에 골프를 소개해 훗날 골프의 싹이 자라도록 해준 씨앗을 뿌린 골프장이었다.
효창원 코스가 문을 닫게 됨에 따라 당시 골프를 좋아했던 유지들은 다른 곳에 골프장을 건설하기 위해 골프 코스의 부지를 물색했다.
이때 새롭게 물색한 곳이 바로 청량리 이왕가의 능림을 주변으로 한 넓은 부지였는데 정무 총감인 아리요시 추유이치의 힘을 빌어 이 곳을 차용해 청량리 골프 코스 조성작업에 들어갔다.
 
dot 대구 골프코스
대구 골프코스는 경성의 청량리 골프 코스에 이어 두 번째로 1923에 건설됐다.
경상북도 수성면 대명동(다시)에 위치한 대구 골프 코스는 9홀 규모로 전장 2,800야드에 파35였다.
코스는 자연 글대로의 들잔디를 사용했다. 경상북도 도청의 일본인 관리들과 은행 간부들이 골프장의 회원으로 가입했으나 점차 한국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개장 이후 회원의 가입이 늘어나자 코스 증설의 문제가 대두돼 더블 티잉 그라운드로 사용했지만 전장 5,590야드, 파69의 18홀을 갖춘 코스로 발전했다.
조선골프연맹이 창립된 이래 1937년 9월 23일에 이 골프 코스에서 한국 최초의 전조선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훗날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로 그 명맥이 이어갔다.
첫 대회는 16명의 아마추어 선수가 출전해 대구골프 구락부의 일본인 회원이 우승을 차지했다.
 
dot 청량리 골프코스
18홀 정규 코스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청량리 골프 코스는 일본인 이노우에 노부라는 코스 설계자가 설계했고 건설 자금은 만철(만선철도국의 약칭)에서 2만엔이 출자됐고 각계 유지들에게 2만엔을 거둬 1924년 4월 20일 착공하고 12월에 완공됐다. 그리고 청량리 골프 코스 착공을 기념해 1924년 사단법인 경성골프구락부가 창립했다. 경성골프구락부를 만선철도국과 조선호텔에서 분리시키기로 결의해 골프장 자체를 독립시킨 날이기도 했다.
효창원 골프코스가 조선 호텔 부속 골프장에서 독립된 골프장으로 분리, 법인체로 독립된 것이다.이에 명칭도 사단법인 경성 골프구락부로 바꾸었고 임원진도 새롭게 교체했다.
청량리 골프 코스는 독립된 골프장으로 발족 개장된 후 다시 군자리 골프 코스로 1929년 6월 22일 옮길 때까지 5년간 명맥을 유지했고 또 조선 최초의 제1회 전조선골프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사단법인 경성골프구락부의 탄생은 한국 골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경성골프구락부는 회원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당시 일본의 정상급 프로 골퍼인 후쿠이 카쿠치나 나카카미 가츠이치를 초청해 시범 경기를 갖는 등 수준 높은 골프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청량리 골프 코스는 총 연장 3,906야드. 프론트 9홀은 1,759야드로 파33, 백 9홀은 2,147야드로 파37로 18홀 파70이었다.

청량리 골프 코스에 대해 연덕춘이 회고한 기록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
연덕춘은 군자리 골프 코스 시대부터 골프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린은 효창원 골프 코스와 마찬가지로 샌드(모래) 그린이었다. 볼이 온 그린이 되면 그린 바닥에 모래가 있기 때문에 볼이 푹 파묻혀 볼을 집어내 고무래로 볼 자국을 긁어 평편하게 고른 다음 퍼팅을 했다. 그리고 그린 주위에 볼 자국을 지우는 고무래가 준비돼 있었다. 코스의 상태는 코스 주변에서 버섯이 많이 났고 그린은 16개였으며 티잉 그라운드는 18곳이었는데 1번 홀 그린은 두 번 사용했다. 우드는 대개 3개였고 1, 2, 3, 4, 5, 6번까지 6개의 아이언을 사용했다. 특히 1번 아이언은 드라이빙 아이언이라 불렀고 이것으로 티샷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7, 8, 9번 아이언이 나오지 않았을 때라 6번 아이언(니블릭)을 가지고 어프로치샷을 하거나 벙커샷을 했다. 물론 샌드웨지나 피칭웨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량리 골프 코스를 이용한 골퍼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한국 사람은 의사였던 박용균씨 등 몇 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청량리 골프 코스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18홀 코스로 최초의 골프선수궈대회도 개최됐다.
당시 대구와 원산에 골프 코스가 운영 중이었기 때문에 1925년에 제1회 전조선골프선수권대회가 이 코스에서 개최됐다. 경기 방식은 홀 매치플레이였는데 마지막까지 올라온 골퍼들의 실력이 백중세를 보여 경기가 끝나지 않아 2일간 계속된 일도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바로 이 대회가 우리 나라 최초의 골프선수권대회였을 것이라 믿고 있다.
당시 골프장을 이용하는데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의 차별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으로 들었다.
한국 사람 가운데 골프를 즐긴다면 어느 정도 상류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연덕춘의 회고는 기억만으로 증언했음을 밝힌다.

 
dot 평양 골프코스
일본인 프로 골퍼 나카카미 가츠이치가 설계와 공사에 대한 지휘 감독을 실시해 1928년 11월 28일에 건설된 평양 골프 코스는 2,550야드의 9홀 규모였다.
평양 골프 코스는 평양부의 의암리(당시)에 건설됐다. 이 골프 코스도 주로 일본인이 이용했고 점차 한국인도 늘어났다. 일본 골프계에서 명성을 떨쳤던 나카카미가 이 골프장 설계를 맡은 것은 경성골프구락부가 일본에서 그를 초청해 회원들의 레슨을 맡도록 한데서 인연이 됐다.
얼마 후 평양 골프 코스는 9홀을 더 늘려 18홀로 확장했지만 고려 잔디를 입힌 그린, 규모와 시설등은 정식 골프 코스라고 하기에 무리가 따랐다.
당시 이 골프 코스를 이용하는 골퍼는 역시 일본인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철도국 직원이 그 주종을 이뤘으며 만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여행자들과 철도호텔 숙박객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클럽 하우스는 철도 호텔 안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비행장으로 변한 이 코스는 해방 후 복구되지 못했다.
 
dot 군자리 골프코스
경성골프구락부 일명 군자리 골프 코스는 당시 행정 구역상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군자리였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능동 438번지.
전조선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를 계기로 청량리 골프 코스가 대회를 치르기에 여러모로 부적격하다는 논의가 일었다. 시설도 형편없고 18홀이지만 파70에 총 3,942야드로 거리가 짧아 국제 규모의 정식 규격을 갖춘 골프 코스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돼 골프 코스 이전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새로 부지를 물색한 곳이 바로 이왕가의 유릉으로 지금의 어린이 대공원 자리인 군자리였다. 이곳은 30만평에 이르는 넓은 부지였다.
이때 경성골프구락부의 회원이자 이왕직 장관이었던 일본인 시노타 치사쿠가 영친왕 이은 공에게 간청해 이곳을 무상으로 빌렸다.
이은 공도 골프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군자리 골프 코스를 조성할 때 이은 공의 도움은 컸다.
그는 골프장 건설 자금으로 2만원을 지원하고 3년 동안 5천원의 보조금을 내놓기로 약속했다.
유지들의 기부금을 비롯해 건설비용이 어느 정도 마련된 1927년 6월 11일 군자리 골프 코스 공사가 시작됐다.
코스의 설계는 당시 미국과 영국식의 코스 설계에 조예가 깊었던 일본 최고의 아마추어 골퍼 아카보시 로쿠로가 맡았고 골프장 건설위원인 혼마 도쿠오가 건설 책임을 맡았다.
경성골프구락부 즉, 군자리 골프 코스는 그 해 기초적인 공사는 일단 마무리됐지만 1929년 6월 22일 정식으로 개장했다. 이로부터 한국 골프의 새역사를 맞이했다. 또한 사단법인 경성골프구락부는 군자리 골프 코스로 옮겼다.
한국 골프사에서 한 획을 근 바로 군자리 골프 시대가 개막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계기로 경성골프구락부는 명실상부한 한국 골프계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경성골프구락부 즉 군자리 골프 코스와 연덕춘, 이후 서울골프장과 연덕춘, 또한 한국 프로 골퍼와 연덕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연덕춘은 군자리 골프 코스에 대한 추억이 많다. 왜냐하면 이 코스에서 골프를 시작했고 또한 일본 골프 유학 길에 올라 결국 1941년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연덕춘은 "개장 당시 회원은 40여 명이었고 1941년 폐장될 때 회원 가입금은 5백원이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매우 큰 돈이다. 골프 코스는 전장 6,160야드에 파69였다. 그린은 처음에 고려잔디였으나 1938년 경에 벤트 그라스로 바꿨다. 그런데 벤트 그라스는 자주 병이 나서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골프장은 병을 예방하기 위해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했으나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1943년 폐장될 때까지 군자리 골프 코스에서 소속 프로로 활동했다. 다시 골퍼는 신사 중에 신사였다.
닉카라는 무릎까지 오는 바지에 스타킹 그리고 와이셔츠 같은 상의를 반드시 입었다.
특히 에티켓을 지킬 줄 모르는 골퍼로 지적되면 티잉 그라운드에서 퇴장시킬 정도로 엄격했다. 당시 캐디들은 모두 남자였다."는 등 당시의 상황을 기억했다. 1941년 경부터 일본의 간섭이 심해졌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인 1943년에 군자리 골프 코스는 완전 폐쇄됐다. 이유는 송진 채취와 비행장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코스는 해방 후까지 밭으로 변했고 다시 서울골프장으로 탄생되기까지 기구한 운명을 가졌다. 하지만 군자리 골프 코스는 한국 골프의 역사와 프로골프의 역사가 숨쉬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dot 부산 골프코스
부산 골프 코스는 1932년 2월 8일 한국인 유지들과 일본 관민들이 힘을 모아 건설했다. 이곳은 부산 남면의 수영천 변에 위치했는데 일본인 아카보시 로쿠로가 설계했다.
전장이 2,610야드, 파33홀인 이곳은 작은규모이긴 했으나 한국인 회원들이 많았다. 특히 코스 주변에 해운대 온천과 동래 온천이 있어 골퍼드에게 인기가 좋았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비행장으로 개조됐으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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